알롱 드롱

주금파 영화감독 / 기사승인 : 2024-08-27 1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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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금파 극작가

 

2024년 8월18일 7~80년대 중국녀성들의 우상이였던 프랑스 배우 알롱 드롱(阿兰德龙)이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35년11월8일에 태여난 알롱 드롱은 네살때 부모가 리혼하며 가난한 동년과 소년시기를 보냈다. 17세에 군입대했다가 스물둘이 되던 1957년에 무명배우였던 당시 여친의 소개로 배우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꽃미남 배우였지만 무려 20년 가까이 무명기를 겪게 된다. 그러다가 마흔살이 되던 해인 1975년에 운명적인 작품에 출연한다. 바로 협객조로(侠客佐罗)의 형상을 출연하여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대배우로 우뚝 선다. 프랑스와 이딸리아 공동제작한 이 영화는 1978년에 중국에 상영된다.


같은 해인 1978년에 다까구라겐(高仓健)이 남주역으로 열연을 펼친 일본영화 추포(追捕)라는 영화도 중국대륙에서 상연된다. 눈섭이 시커먼 과묵한 남자 뚜츄라는 주인공의 매력에 중국녀성들의 우상이 된 다까구라겐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당시 중국인구통계가 9억6천3백만명이였다. 그런데 영화(추포)를 관람한 연인수는 9억인차, 이것은 한사람이 어러번 관람했다는 증거이다. 최고로 한사람이 54차나 관람했다고도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1978년12월20일 선포된다. 그러니까 이 두편의 영화가 중국대륙에서의 상영이 개혁개방의 문화선전편이 역할을 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중국녀성들은 중국에서 련인, 남편으로 선택할 남자가 없다고 할 지경이였다. (추포)와 (조로) 이 두편의 영화가 중국영화계 꿈나무들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 중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명감독 장예모도 다까구라겐을 우상으로 숭배했고 영화인이 될 꿈을 꿨다고 실토했다. 영화(붉은 수수)와 (영웅)으로 이미 국제적인 명감독이 된 장예모는 2005년에 (千里走单骑)라는 영화에 자신의 우상인 다까구라겐을 모셔다 출연시킨다. 결과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우상인 명배우와 합작은 영화인생에 한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다까구라겐은 에리 치에미(江利智惠美)라는 동료녀배우와 결혼한다. 그런데 결혼후 임신수개월후 임신중독으로 류산하게 된다. 연이은 촬영에 출장이 잦았던 다까구라겐은 출장이 잦았고 류산한후 실의에 빠졌던 안해 에리 치에미를 따뜻하게 보살펴주지 못했다. 이로서 두사람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리 치에미는 매일 술에 절어있었다. 

 

서로 위로와 배려가 적었던 두사람은 리혼이라는 아픔을 안게 된다. 리혼후 두사람 모두 혼자 살았다. 그렇게 십수년을 지내다가 에리 치에미가 사망한다. 사망원인은 술취한후 자다가 토사물이 호흡도를 막아서 질식한것이다. 그때 에리 치에미의 나이는 고작 45세였다. 뒤늦게 전처의 사망소식을 듣고 흰국화 한송이를 들고 찾아온 다까구라겐은 후회와 자책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내 인생에 진정으로 사랑했던 녀인은 에리 치에미 한사람뿐이다)라고 말했다.


1996년 65세의 로배우가 된 다까구라겐은 홍콩에서 오다키(小田贵)라는 무명 녀배우와 같은 영화에 출연하며 아는 사이가 된다. 두사람의 나이 차는 33세, 그때 오다키의 나이는 32살이였다.


다까구라겐은 2014년 11월10일에 83세로 사망하는데 슬하에 혈육이 없었던 그는 로년에는 18년전 알게 된 오다키의 보살핌을 받았다. 안해도 연인, 양딸도 아닌 보모라는 명목으로 곁을 지켜줬는데 대까구라겐은 (오다키는 내게 엄마이자 연인이자 딸같은 존재)라고 말했단다.
늙고 쇠락해지면 아무리 전세계 관중들의 우상으로 우뚝 섰던 거장도 이렇게 작아지는가부다. 돌아갈때 40억엔이라는 막대한 재부를 남겼지만 친인척들께는 한푼도 주지않고 마지막를 지켜준 오다키에게 상속되였다고 한다. 일본영화계의 거장의 서거를 륭중하게 장례지내려 했지만 오다키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친인척들이 와서 마지막 모습을 보여달라 했지만 오다키는 거절했다. 친인척들은 유체를 화장하지말고 가족장지에 묻자고 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오다키는 스스로 화장한 골회를 안고 가서 바다에 뿌려버렸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의 말년이 비참하지는 않았지만 원만하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대배우 알롱 드롱은 영화배우로 입문하여 18년간 무명으로 뛰다가 영화(조로)한편으로 일약 세계적인 대배우라는 명성과 2억유로라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거뒀다. 그는 평생 결혼은 한번뿐이고 그후 련인은 세명 있었다고 한다. 결혼과 애인들 사이에 태여난 자녀는 4명이다. 명성과 재부를 다 가졌고 또 슬하에 네명의 자녀를 그에게 행복만 있을것 같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의 재산을 탐낸 자식들은 사로 재산분할로 싸웠고 큰아들은 마약과 도박으로 경찰서를 자주 드나들었다.


알롱 드롱의 말년의 동반자는 일본여인이였는데, 그녀인이 14년간 보살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자 이제 곧 아버지가 죽을거라는걸 알게 된 자식들이 몰려와서 아버지를 십년 넘게 지켜준 일본애인을 쫓아버렸다. 이미 의식이 불분명했던 알롱 드롱은 그런 자식들의 불효를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드디여 어제 그는 눈을 감았다.


7~80년대 중국 녀성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두 명배우는 명예와 부를 모두 거머쥐였지만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다. 사람에게 나이만큼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뭘 하나? 곁을 지켜주지않는 사람이 없으니 말년이 초라하고 쓸쓸한건 여느 평범한 로인네들과 다를바가 없다.


현재 중국에는 2억9천7백만명이라는 로인들이 있다. 그중 대부분이 "한 아이 정책"을 지키는 년대를 살아온 사람들로 슬하에 자식은 한명뿐이다. 이건 우리 나라가 우리국가가 우리사회가 풀어야 할 난제이고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중국의 로인들과 비해보면 다까구라겐과 알롱 롱의 만년은 너무 여유롭고 행복했다고 할수있으리라!!?

 

주금파
극작가, 영화감독

중국 연변영화드라마예술가협회 회장
연변희성영화드라마제작회사 법인대표
원 연변TV방송국드라마 PD

주요작품:
영화(부모) (아리디연가) (경찰관의 이야기) 드라마(자전거) 등 다수
제22회서울프라이즈TV부문 대상, 중국소수민족제5회"금붕상"대상, 연변진달래문예상 창작상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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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연변영화드라마예술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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